영화 보는 중(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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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영화 '에로스: 그녀의 손길' 후기: 손으로 느끼는 그녀의 숨결
에로스, 사랑의 화살을 쏘는 그리스 신화의 신, 그리고 성의 본능을 뜻하는 말. 에로스라는 담론을 두고 영화계의 세 거장들(왕가위, 스티븐 소더버그, 그리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우니 감독)이 모여 2004년 옴니버스 영화가 제작된 바 있다. 그중 국내 관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왕가위 감독 특별전' 56분 확장 편집판 '그녀의 손길(The hand)'에서 왕가위 감독의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고급 창부인 후아(공리 분)의 전용 재단사 장(장첸 분). 수습생 시설 자신의 다리 밑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을 잊지 못한 채 연모의 마음을 키워간다. '에로스'라는 제목답게 이 영화는 야하다. 제대로 된 성애 장면 하나 없이 오로지 손 끝으로만 관객의 성적 본능을 자극시킨다. 왕가위 감독의 전작 '화양연화'..
2021.04.11 -
넷플릭스 영화 '낙원의 밤' 후기: 누아르의 밤, 제주도의 개들
오마주와 콜라주 그 사이(오마주: 존경의 의미로 사용하는 다른 영화의 인용, 콜라주: 별개의 것들을 덧붙여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예술 기법). '무간도'의 향취가 진하게 배어있는 영화 '신세계'부터, '드래곤 볼', '아키라' 감성의 '마녀'. 대중들이 환호했던 박훈정 감독의 영화들은 과할 정도로 다른 영화의 것들을 가지고 한국영화의 작법으로 버무려서 멋지게 만들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못하는 영화들이 수두룩한 걸 감안하면, 상술한 그의 특색은 박훈정 감독만이 갖는 오리지널리티 일지 모른다. 영화 '낙원의 밤'은 범죄 조직 간의 암투 '신세계'로 시작해서,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의 창고 시퀀스로 이어지더니, '마녀' 속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
2021.04.10 -
영화 '노바디' 후기: 소심한 가장의 화풀이 액션
'누구 하나 내 손에 걸리기만 해 봐라.' 너무 열 받고 짜증 나면 누구나 속으로 한 번쯤 생각하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손목에 쇠고랑 차고 싶지 않아서 합법적인 다른 무언가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다반사. 영화 '노바디'의 주인공 '허치(밥 오덴거크 분)'는 수년간 쌓였던 울분을 러시아 마피아 조직과 함께 푼다. 물론 러시아인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서 불쌍해 보일 정도다. 미국에는 은퇴한 특수 요원들이 참 많은 듯싶다. 은퇴한 CIA 요원의 딸이 납치당하거나(예: 테이큰), 전설적인 킬러의 개가 죽거나(예: 존 윅)하면서 말이다. 영화 '노바디'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설적인 정부 요원쯤으로 보이는 허치가 은퇴 후 화목한 가정을 이루지만, 너무 평화로운 나머지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
2021.04.08 -
넷플릭스 애니 '마법 관리국과 비밀 요원들' 후기: 빈약한 캐릭터와 상상력
과자로 만든 집, 빵 부스러기로 표시한 길잡이 등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마법 관리국과 비밀 요원들'이 넷플릭스에서 새롭게 공개됐다.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 넷플릭스 차트에서 1위까지 한 작품. '마법 관리국'은 흡사 '해리포터 시리즈'의 마법부를 연상케 하지만 작중 환상적인 마법의 존재감은 극히 미미하다. 원작 동화 속 마녀가 만드는 약물 수준이 전부다. 동화의 재해석은 드림웍스의 '슈렉 시리즈'보다 많이 떨어진다. 마녀의 수하로 나오는 귀여운 '컵케이크'들에서도 '미니언즈'의 잔상을 떨칠 수가 없다. 당차고 야무진 그레텔과 사기꾼 헨젤. 불쌍하기만 했던 남매를 색다르게 조형했으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엔 캐릭터성이 많이 모자라다. ..
2021.04.07 -
영화 '나이브스 아웃' 후기: 정통파 추리 소설의 향기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목격자들을 조사하고, 명탐정이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추리소설들이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머리카락 한올에서 발견되는 DNA로 사건을 해결하는 현대의 과학수사와는 다른, '탐정'이라는 불세출의 천재들의 추리쇼가 등장하는 정통파 추리물을 자처한다. 케네스 브레너 감독, 주연의 아가스 크리스티 원작 소설의 영화화 시리즈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이 상술한 정통파 추리물로서 당당히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원작 소설의 분위기도 못 살렸으며, 명탐정 푸아로의 연기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영화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라는 클리셰를 과감하게 뒤엎은 추리 소설 명작 ..
2021.04.04 -
영화 '스파이의 아내' 후기: 영화 속 사토코가 패전의 현실로 빠져나오기까지
1940년. 세계 2차 대전의 암운이 일본 열도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제국주의에 잠식된 일본만 모를 뿐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사업가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 분)'와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 극 중 인물들의 행동은 자국의 전범 사실을 영화 '스파이의 아내'로 다루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용기와 동일 선상에 있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는 만주에서 인간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전범 사실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연합국(미국, 영국 등) 국적의 외국인들을 무작위로 체포해 스파이인지 조사하는 헌병들. 국민 복색이라며 서구식 의복이 아닌 기모노를 국민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하는 국가. 암울한 세상 속에서 사업가의 아..
2021.04.01 -
영화 '커피 오어 티' 후기: 참을 수 없는 영화의 가벼움
청춘이니까 아파도 된다, 젊으니까 사서 고생하라.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잔소리를 퍼붓는 세상에서, 청춘을 위로하고 그들의 성공을 옆에서 지켜보는 중국 영화 한 편이 새롭게 개봉했다. 청춘의 무게감은 어설픈 말 한마디, 영화 한 편으로 쉽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건만, 영화 '커피 오어 티'는 그저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 잇따른 사업실패로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결심한 웨이 진베이(류호연 분). 택배 배달을 위해 옥상까지 찾아온 펑 시우빙(팽욱창 분)을 따라 그의 고향 '윈난'까지 따라가게 된다. 전화도 잘 안 터지고, 인터넷 쇼핑이 뭔지도 모르는 시골 오지에서 커피농사를 하는 리 샤오췬(윤방 분). 젊음이라는 무기 하나로 세상에 부딪히는 세 청춘들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산간벽지에서의 힐링, 인터넷을 매개로 ..
2021.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