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파이의 아내' 후기: 영화 속 사토코가 패전의 현실로 빠져나오기까지

1940년. 세계 2차 대전의 암운이 일본 열도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제국주의에 잠식된 일본만 모를 뿐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사업가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 분)'와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 극 중 인물들의 행동은 자국의 전범 사실을 영화 '스파이의 아내'로 다루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용기와 동일 선상에 있다.  

엠엔엠 인터내셔널,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영화 '스파이의 아내'는 만주에서 인간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전범 사실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연합국(미국, 영국 등) 국적의 외국인들을 무작위로 체포해 스파이인지 조사하는 헌병들. 국민 복색이라며 서구식 의복이 아닌 기모노를 국민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하는 국가. 암울한 세상 속에서 사업가의 아내로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사토코'. 남편이 소소하게 찍는 단편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직원들에게 상영하는 '영화 놀이'를 즐긴다. 만주에서 우연히 일본의 만행을 목격한 남편 '유사쿠'. 주변인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와중에 위험천만한 내부고발이자 양심선언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온실 속의 화초와 다름없는 사토코는 남편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만류하지만, 남편이 찍어온 영화 필름 속 참혹한 현실을 목도한 후 자신도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한다. 

 

소재가 워낙 민감해 엎어질 뻔하다가 NHK의 개념 있는 투자 덕분에 겨우 제작이 됐다고 한다. 본래 NHK에서 방영한 단막극이었으나, 화면비 수정과 색보정을 거쳐 극장판 영화로 만들어졌다. 2020년 11월 부산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작이며,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 수상작이다. 제목에 '스파이'가 들어가 있어 '서스펜스'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에스피오나지 장르물로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스파이의 아내'는 한 가지의 장르로 분류하기 힘들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드라마'에 가깝다. 극적 긴장감을 의도한 연출이나 서스펜스는 찾아보기 힘들다.

 

엠엔엠 인터내셔널,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코즈모폴리턴(세계주의자)이라 자칭하는 유사쿠의 정체가 스파이인지, 그냥 양심 있는 사업가인지의 여부는 끝내 밝혀지진 않는다. (그의 베일에 싸인 면모가 진정한 스파이 같기도 하다.) 반은 어둠에, 반은 빛 속에 드러나는 유사쿠의 얼굴을 보여주는 연출이 그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작중 부부가 찍는 단편영화(제목도 따로 없다)가 영화 속에서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영화 속 영화의 사토코의 행적(몰래 금고를 열다가 걸리고, 사랑에 배신당해 죽는 등)과 영화 속 사토코가 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결말부에서 상영되는 영화 속 영화의 배경 음악 가사와 사토코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연출이 인상 깊다.

 

생각해보면 사토코가 맞닥뜨린 전범의 만행도 영화로 접한 게 전부다. 영상매체가 주는 현장감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결국 한계성이 있기 마련. 그녀가 작중 맞닥뜨렸던 모든 것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사토코가 믿는 이데올로기는 '사랑'이다. 사랑만 있다면 스파이의 '아내'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미국이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믿었던 이데올로기에 배반당하고 처음으로 직접 겪는 현실은 패전국 일본에 퍼진 사이렌 소리와, 공습에 무너진 병원의 모습. 온실 속 사토코의 모습과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는 작금의 일본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통한 울부짖음과 함께 무너진 이데올로기와 패망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토코. 이제 영화 너머 일본도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재밌냐?	YES	NOT BAD	SO-SO	NOT GOOD	NO
'재미'의 종류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추천 포인트	곱씹을수록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비추 포인트	에스피오나지 장르물, 사회고발물을 기대한 분들에게 비추천

 

엠엔엠 인터내셔널,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