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6. 23:44ㆍ영화 보는 중
자그마치 제작비 240억 원이 들어간 영화 '승리호'가 넷플릭스에 공개됐다.(참고로 관객 동원 1700만 명 한국 역대 박스오피스 1위의 영화 '명량'의 제작비는 148억 원이다.)의 본래 SF 장르 중에서도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험활극인 '스페이스 오페라'물을 좋아했고 한국의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예전부터 계속 관심이 갔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일단 영화적 때깔이 중요하다. 디스토피아적 사이버 펑크스럽고, 미래이면서도 그렇게 멀지 않은 근미래적 설정, 그런 혹독한 환경에 또 적응해서 사는 사람들. 그래서 분장이나 세트장 같은 미술에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우주를 배경으로 특수효과, CG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제작비가 또 많이 들어간다. 어설프게 만들면 티가 확 나고, 너무 잘 만들려 하면 제작비가 과하게 들어가서 흥행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만들더라도 제작비가 풍부한 할리우드(예: 스타워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표현이 좀 자유로운 애니메이션(예: 카우보이 비밥)으로 많이 만들어진다.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진 '승리호'는 그 때깔 하나는 정말 잘 구현했다. 상술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제작비가 1억 7천만 달러, 한화 기준 1900억 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승리호는 그 정도 퀄리티를 제작비 240억 원, 달러 기준 2100만 달러 정도로 구현했다. 가오갤 한편 제작비로 승리호를 7편 넘게 만들 수 있다.(물론 배우들의 출연료, 스태프들의 인건비 때문에 단순 비교하는 게 크게 의미는 없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의 때깔이 부럽지 않은, 충무로 토종 영화의 기술적 성취하나만으로도 한국영화사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SF 장르는 미술적 기준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영화에서 보여준 비주얼은 그 이후 나온 영화들에 강한 영향을 줬다. '블레이드 러너' 스러운 SF적 비주얼을 어느 정도 잘 구현해냈느냐가 영화의 완성도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돼버렸다. 승리호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대신 여타의 영화들처럼 기존의 장르적 관습을 충실히 구현해냈다. 그래서 승리호 한편을 보면 여러 영화들의 기시감이 떠오르는 건 당연하면서도 아주 잘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승리호 내부 세트나, 비전투 우주선의 활약을 그린 점에서는 스타워즈의 '밀레니엄 팔콘', 황폐화된 지구의 모습에서는 '블레이드 러너', 돈을 좇으며 모험하는 점은 '카우보이 비밥'이 연상된다.
하지만 승리호가 아무리 장르적 배경을 깔끔하게 잘 구현했다고 하더라도,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서사다. 2시간 16분의 러닝타임 동안 TV 앞에 오롯이 앉아있게 하려면 결국 감독이 들려주는 플롯이 중요하다. 승리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쉽게도 너무나도 매력이 없다. 캐릭터 설정, 그런 캐릭터를 살려주는 대사,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톤, 캐릭터들이 맡은 극 중 역할들이 하나같이 작위적이며, 인물들의 뒷 이야기 등이 재미가 없다. 가오갤을 의식한듯한 배우들의 티키타카, 그리고 유머 등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게 보이지만 역시나 또 재미가 없다. 영화를 보면서 어느 타이밍에 재미를 느껴야 하는 건가 하고 고민이 될 정도다.
황폐화된 지구를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1997년에 방영된 한국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 그리고 픽사 애니메이션 '월-E'가 연상됐다. 영화적 재미는 당연히 월-E까지 가지도 못하며, 독창성은 25년 전의 애니메이션 라젠카에서 크게 나아가지도 못하다. 상위 몇% 의 소수만이 깨끗한 환경의 우주 콜로니에서 살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엘리시움'이 연상되지만, 이마저도 영화 속에서 살리지 못한다. 그리 감동적이지도, 공감되지도 않은 주인공 태호(송중기 분)의 사연만 열심히 팔며, 그 외 승리호 선원들의 뒷 설정들은 스쳐 지나가듯 중반부에나 공개되지만 역시 또 그렇게 흥미롭지도 못한다. 승리호는 우주를 배경으로 훨훨 날아다니지만 감독은 계속 지구만 바라본다. 승리호에게 지구를 지켜내는 영웅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어 했지만 그마저도 멋있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영화 승리호가 보여주는 화려한 그래픽의 뒷면에서 고생했을 CG 인력들의 노고가 참 안타깝다. 제작비 240억 원,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손익분기점이 580만 명 이상을 넘겨야 하는 영화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 500만이 넘은 영화가 단 한편도 없었던 걸 생각하면 '승리호'측의 개봉 연기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가뜩이나 SF 장르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작은 씨앗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뻔했다. 승리호를 큰 스크린, 빠방 한 사운드로 즐길 수 없었단 점에선 아쉬움이 크지만, 제작비의 웃돈(80억 원)을 받고 넷플릭스에 판 것도 괜찮은 판단이었겠다 싶다. 승리호는 장단점이 분명히 갈리는 영화다. 넷플릭스를 구독 중이고, 한국영화의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 판단하고 싶다면 그저 기대감을 비우고 편안히 관람할 것을 추천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재밌냐? | YES | NOT BAD | SO-SO | NOT GOOD | NO |
'재미'의 종류 |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 영화 | ||||
추천 포인트 | 넷플릭스를 구독 중이고, 우주를 활강하는 SF영화 팬인 분들에게 추천 | ||||
비추 포인트 | 영화의 기승전결이 중요한 분들에게 비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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