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 영화 '러브레터' 후기: 이와이 월드의 정점

2020. 12. 25. 00:02영화 보는 중

* 개봉한 지 25년이나 된 영화인걸 감안하여,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포스팅임을 알려드립니다.

 

학창 시절 첫사랑의 추억과, 눈 덮인 설원의 풍경의 기억이 오래 남는 일본 영화가 재개봉했다. 영화 '러브레터'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1995년에 일본에서 최초 개봉한 영화 '러브레터'는 1998년 일본문화가 개방된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 실사영화 기준 최대 관객수 115만 명을 동원한 영화다. 일본에서는 그 존재조차 잊혀진 영화가 됐지만,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계속 기억하며 여러 차례 재개봉한 클래식의 반열에 들었다. 1999년 한국에서 최초 개봉했고, 2013년에 재개봉한 이후 2016, 2017, 2019년 그리고 이번에 2020년 12월까지. 총 5차례의 재개봉이 된 작품이다. 재개봉이 여러 번 됐다는 것 자체가 매번 그만큼 관객이 많이 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필자는 극장에서가 아닌, TV에서 토요명화(더빙판)로 처음 본 기억이 있다. 학창 시절 첫사랑의 추억을 소회 하면서, 설원이 펼쳐지는 풍경에서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명장면이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그때 감명 깊게 봤는지 이와이 월드에 푹 빠진 계기가 됐다. 이번 재개봉 소식에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는데, 처음 봤던 영화의 감상과 지금의 그것이 많이 달랐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이번에 새롭게 관람한 영화 '러브레터'는 죽음의 상징들로 가득 찬 영화였다. 영화의 주 배경인 오타루는 홋카이도 '눈'꽃축제로도 유명한 곳이다. 스크린 가득 보여주는 설원의 풍경 속 '눈'이 뜻하는 것은 죽음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2년 전에 등산 중 조난당해 사망한 '이츠키(남)' 추도식으로 시작한다. 그의 추도식엔 눈이 하염없이 온다. 눈이 상징하는 겨울철의 독감을 앓고 있는 '이츠키(여)'는 중학생 때 독감이 심해져 폐렴으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상황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날씨였다. 이츠키(남)가 등반 중에 죽었다는 고베의 이름 모를 눈 덮인 산에는 여전히 수습 못한 시신이 남아있다. 오프닝의 추도식에 나온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다. 즉 그 산은 망자의 공간이다. 설원을 배경으로 '오겡끼 데쓰까(잘 지내시나요)'의 명장면도 망자의 공간을 향해 외치는 일종의 초혼 의식인 셈이다.

 

 

 

영화 '러브레터'는 히로코가 이츠키(남)의 죽음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우연히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중학교 시절 앨범의 사진과, 뒤에 수록된 주소에 편지를 보내면서부터다. 중학교때 오타루에서 고베로 이사 온 이츠키(남)는, 전에 살던 집주소는 헐어지고 국도가 되었다. 즉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는 건 아무 의미 없는 행위지만,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히로코의 애도 행위다. 망자가 있는 천국에 보내는 편지. 그런데 그곳에서 답장이 온다. 동명이인 이츠키(여)의 주소로 잘못 보낸 편지였던 탓이다. 히로코는 이츠키(여)가 그의 중학교 동창인걸 알고 그의 학창 시절을 공유해달라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영화는 80년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와이 슌지 특유의 영상이 피아노 연주곡과 함께 아련하게 펼쳐진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영화가 원체 옛날 영화이기도 하고, 시대가 급변한 탓인지 지금은 없는 옛날 감성들이 '러브레터'에 가득 차다. 제목부터 러브레터인 편지, 우체통, 얼굴도 모르는 대상과 하는 펜팔, 바코드가 아닌 책 뒤편에 붙어 있는 도서대여 기록카드, 구글 스트리트 뷰가 없어 고베에서 오타루까지 직접 가서 확인하는 모습, 폴라로이드 즉석카메라, 택시가 보일 때까지 걸어 나가야 하는 상황 등. 디지털 시대에 바라보는 아날로그 감성은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함이 있다. 

러브레터
국내도서
저자 : 이와이 슌지 / 권남희역
출판 : 도서출판집사재 199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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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레터'는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 소설의 작가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다. 그는 소설을 먼저 쓰고 영화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러브레터'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러브레터'를 보고 이와이 슌지 감독만의 색채인 이와이 월드가 궁금하다면, 러브레터의 정식 프리퀄은 아니지만 극 중 히로코의 대학생활로도 생각할 수 있는 '4월 이야기', 사춘기 소녀들의 모습을 담은 '하나와 앨리스'를 추천한다. 이 작품들은 이와이 월드 중 화이트 이와이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다소 어둡고, 암울한 내용을 다루는 블랙 이와이의 작품(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등)과는 구분해서 감상하는 게 좋다. (물론 블랙 이와이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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