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6. 00:02ㆍ영화 보는 중
90년대 홍콩 반환을 앞둔 시대의 우울감을 탁월한 영상미로 표현했던 왕가위 감독. 코로나 블루 시대에 개봉 연기작들의 빈자리를 재개봉작들이 채우며 각광받고 있다. 왕가위 감독의 최근 재개봉작 '화양연화'는 박스오피스 2위, 10만 관객을 동원할 정도. 그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영화 '중경삼림'이 4K 리마스터링을 거쳐 돌아왔다.
왕가위 감독은 '동사서독'을 찍으면서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았는데(한없이 늘어지는 영화 작업방식에 기인한 스스로의 잘못이기도 하다), 중경삼림을 가벼운 마음으로 찍으면서 나아졌다고 한다. 그 덕에 중경삼림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왕가위스럽지 않은 영화가 됐다. 그의 영화 '타락천사'는 본래 중경삼림의 3부에 해당하는 에피소드였으나 1, 2부 만으로 러닝타임이 100분이 넘어가서 따로 제작해 개봉했다.
중경삼림, 중경의 빌딩 숲이란 뜻이다. 중국의 충칭시(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치했던 그 충칭시가 맞다)에서 이름을 따온 빌딩 이름 '충킹맨션'. 작중 마약 밀매상으로 나오는 임청하가 초반부 밀수를 위해 외국인들을 고용하고, 쫓기는 장면 등이 이 충킹맨션에서 촬영됐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렴한 값에 숙식을 해결하고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되던 곳이다. 지금은 리모델링을 해서 깔끔해진 편이라고.
'중경삼림'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람 간의 이별과 만남을 주제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테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구분하진 않았지만 크게 1, 2부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사랑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이별통보를 받은 경찰 223 하지무(가네시로 다케시, 금성무 분).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 한 달간 그녀의 연락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그 한 달간 연락이 없으면 깨끗이 잊는 걸로. 그래서 그가 정한 사랑의 유통기한은 1994년 5월 1일. 그녀의 이름도 메이(May, 5월)다.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이 담긴 통조림을 날마다 하나씩 사서 쌓아놓는다. 통조림의 유통기한 역시 5월 1일. 이 유통기한 관련해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대사가 나온다.
사랑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없기를 바란다.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1부의 하지무가 지질할 정도로 시간에 집착했다면, 2부는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제복 경찰 663(양조위 분)을 짝사랑하는 페이(왕페이 분). 그녀의 전 여자 친구가 663에게 전해 달라는 편지봉투 속에서 663의 집 열쇠를 얻는다. 그리고 페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인 가택침입을 행한다. (왕페이의 산뜻한 매력과 왕가위의 선곡센스 덕에 귀여운 사랑 행각으로 보인다) 663에 대한 마음을 그가 사는 공간에 침투하면서 시작한다. 663의 전 여자 친구의 시간이 담긴 물건들을 하나씩 바꾸고, 자신의 물건들로 그 공간들을 다시 채워 놓는다. 663은 덕분에 쓰디쓴 이별의 과정을 이겨내고 그의 곁에 있어준 페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상술한 내용만 보면 낭만적인 로맨스 영화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중경삼림은 왕가위의 영화다. 사건이나 인물 간 대사를 통해 영화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독백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고 그 여백을 미장센과 탁월한 선곡으로 채운다. 독백은 마치 시를 읊어주는 느낌으로 상징성과 은유로 가득 차 있다. 1부에서 나오는 금성무와 임청하의 추격신, 2부에서 양조위가 커피 마시는 씬은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 마마스 &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왕페이의 '몽중인'의 여운은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도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타임지 선정 100대 영화, 정성일 평론가가 극찬하는 영화 등 모두가 손꼽는 명작 반열에 든 영화 '중경삼림'. 오랜만에 재개봉해 (1995년, 2013년, 2021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그래서 재밌냐? | YES | NOT BAD | SO-SO | NOT GOOD | NO |
'재미'의 종류 | 90년대 감성 가득한 왕가위 영화 | ||||
추천 포인트 | 독특+풋풋한 감성의 로맨스 영화를 찾고있는 분들에게 추천 | ||||
비추 포인트 | 영화에는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비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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