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9. 01:48ㆍ영화 보는 중
신에게 인간의 희생을 바치는, 인신공양. 지구 상의 인류 역사에서 인신공양이 없어진 것은 불과 몇백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인류는 그동안 다수의 행복을 위해, 모두를 위한 일이라며 한 생명의 무게를 아무렇지 않게 희생해왔다. 신카이 마코토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는 '기청제(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제사 의식)의 무녀에 대한 판타지 섞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초속 5cm' 다. 첫사랑의 감정을 3부로 연작 구성한 중편 분량의 애니메이션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도시의 풍경, 사물에 대해서는 실사인가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특성이 있다. 대신 인물 묘사는 전형적인 일본 만화풍보다 조금 더 떨어지는 수준의 그림체를 갖는다. 이 특징들은 그의 이후 작품들에서 반복된다. '초속 5cm', '별을 쫓는 아이'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심심한 맛이 강했다고 한다면, '언어의 정원'에서는 후반부에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출 기법을 선보인다. 초중반부까지 사건들과 인물의 감정들을 촘촘히 쌓는다. 후반부에 주인공의 용기 있는 행동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사운드트랙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아드레날린을 터뜨려버린다. 이런 연출 특색이 정점을 찍었던 '너의 이름은.'으로 각종 일본 내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치웠으며(그 기록들은 '귀멸의 칼날: 무한 열차 편'이 다시 갈아치우고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만 인기가 많았던 한국에서도 37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하기의 포스팅부터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위치가 된 신카이 마코토. '날씨의 아이'라는 제목이나, 포스터, 줄거리만 얼핏 봐서는 날씨와 관련된 일본의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상술했듯 인신공양을 다루고 있다. '비를 그치게 하기 위해선 무녀의 희생이 필요하다. 모두를 위해서 당연한 선택이다'라는 그동안 여타의 영화, 만화 등에서 익히 봐왔던 설정들을 과감하게 뒤엎어버린다. '세상이 물에 잠기든 말든 내 눈앞의 한 사람을 보호한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면 안 된다.' 라며 약간 다른 버전의 일본 침몰을 일으킨다. 그들의 선택에 당혹스러웠던 나 스스로도 공리주의에 얼마나 물들어 있었는지, 그런 환경 속에서 당연스레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비를 그치게 하는 무녀'라는 판타지적 설정에 비해, 애니메이션이 다루는 갈등의 근저는 현실 속에서 이뤄진다. 서울과 도쿄의 풍경은 묘하게 비슷한 점이 많아, 애니메이션 속 풍경이 그리 생경하지는 않다. 다만 갈등을 다루는 소재가 총기(실제로 가부키초를 주름잡는 야쿠자들의 총기 소지 문제가 많다고 한다), 가출청소년, 아동 보호인 탓에 상대적으로 거리감이 든다. 갈등을 일으키는 세력들도 어른과 아이라는 다소 뻔한 양상이다. 그래서 후반부 신카이 마코토식 터뜨리는 연출기법이 그렇게까지 와 닿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하고, 비슷한 소재를 많이 다뤘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날씨의 아이'를 다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섞은 궁금증을 가져본다.
국내에는 2019년 10월에 최초 개봉했으며,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했다. 1,110만 달러의 제작비로 월드 박스오피스 1억 9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본인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면서 흥행도 확실히 챙기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그의 다음 행보도 기대된다.
그래서 재밌냐? | YES | NOT BAD | SO-SO | NOT GOOD | NO |
'재미'의 종류 | 판타지를 곁들인 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 | ||||
추천 포인트 | '너의 이름은.' 이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행보를 확인하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 ||||
비추 포인트 |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눈이 높아진 분들에게 비추천 |
PS. 결말부 히나와 호다카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햇빛이 살짝 보이면서 끝이 난다. (공식 일러스트에도 도쿄에 햇빛이 다시 든 걸로 나온다). 그들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끝나면서, 행복한 미래가 펼쳐진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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