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7. 16:50ㆍ영화 보는 중
일본에서 개봉 이후 자국 내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여전히 흥행 중인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하 무한열차편)'이 국내에도 개봉했다. 애니메이션이 약세인 국내 극장가에도 예매율 1위를 기록하는 등 관객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물론 당분간은 메가박스 단독 개봉이기에 관객수는 상대적으로 덜 들 수밖에 없다)
오늘 보고 온 '무한열차편'은 TVA 귀멸의 칼날 1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열차에서 계속 수십 명이 사라진다는 귀살대의 보고에 파견된 염주 '렌고쿠 쿄주로', 호흡법을 새로 익힌 주인공 '탄지로' 일행은 이 문제의 '무한열차'에 탑승한다. 거두절미하고 '무한열차편'의 본론부터 이야기하면, TVA에서와 마찬가지로 높은 퀄리티의 작화, 화려하고 멋들어진 액션 연출, 그리고 탄지로 일행의 가슴 아픈 사연들은 극장판에서도 여전히 명불허전이다. TVA 제작사 유포테이블의 실력은 극장판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으며, 성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전반적으로 양호한 '무한열차편'의 아쉬운 점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양호하다'는 점. 극강의 퀄리티와 감동을 선사했던 TVA에 비슷한 수준의 극장판이라는 점이다. 극장판이란 본래 TVA보다 더 높은 퀄리티와 작화 등이 일반적이다. 이번 무한열차편은 극장판 애니만의 아스트랄함 같은 게 없이, 그저 무난한 2시간짜리 TV 스페셜을 보는 느낌이다. 물론 이 정도도 못하는 다른 애니메이션도 많은걸 감안하면 워낙 수준 높았던 유포테이블의 귀멸의 칼날 TVA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귀멸의 칼날의 팬이라면 두 번 고민 않고 극장으로 달려가는 것을 추천하며, 팬이 아니라면 TVA부터 보고 본인 취향에 맞는지 판가름해보는 걸 추천한다.
하기의 포스팅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열차'라는 소재는 그간 영화에서 애용하던 장치다. 계속 앞으로 달려가는 직진성, 한 칸씩 지나서 가야 하는 단계별 시퀀스, 사실상 갇혀 있고 좁은 공간의 폐쇄성. 봉준호 감독은 세기말 열차에 계급사회를 투영해서 '설국열차'를 만들었고 이는 동명의 미국 TV시리즈로도 만들어져 넷플릭스에 성황리에 방영 중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열차라는 폐쇄된 공간에 살인사건을 일으켜서 '오리엔탈 특급살인'이라는 소설을 썼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무한열차편'에서도 좁은 공간에서 혈귀들과 귀살대의 전투를 그리고 있으며 상술한 열차의 특성들(돌진하는 기차 등) 이용해 화려한 액션신들을 연출했다.
'무한열차편'에 등장하는 메인 빌런으로 나오는 혈귀 하현 1 '엔무'는 상대방을 잠들게 하는 혈귀술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귀살대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꿈에 침투해 폐인으로 만드는 무서운 기술이다. (일본어로 무한과 몽환(=꿈과 환상)은 발음이 같다고 한다.) 그 어떤 강한 귀살대가 와도 사실상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전술이다. '잠들게 한 후 꿈에 침투한다'라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이 연상된다. 인셉션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일행이 설계하고 의도한 꿈을 꾸게 만들었다면, 무한열차편에서는 당사자의 가장 행복한 염원을 꿈으로 이루게 해 준다.
귀살대 일행들의 꿈을 들여다보면 처연하기 그지없다. 주인공 탄지로는 그저 가족들과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게 끝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 가족들이 혈귀들에게 처참히 살해당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4명의 동생이 끔살 당하고, 겨우 숨이 붙어있던 동생 네쥬코는 혈귀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복수를 다짐하고 하나뿐인 가족 네쥬코를 다시 사람으로 바꾸기 위해 험난한 여정 중이다. 현실이 곧 가장 불행하고, 꿈속이 가장 달콤하다. 꿈에서나마 볼 수 있는 가족들을 철천지 원수인 혈귀가 제공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젠이츠는 좋아하는 사람과 산속을 산책하는 소소한 데이트를 하는 꿈을 꾼다. 멧돼지 탈을 쓰고 다니는 이노스케는 탄지로 일행을 자신의 부하로 삼아 동굴 속을 탐험한다. 그리고 무한 열차편의 진 주인공은 렌고쿠 쿄주로는 아버지에게 '염주'가 됐다고 보고하는 과거를 회상한다. 그들의 가장 행복한 꿈은 이게 전부다. 상술한 탄지로를 포함해 무한열차 속 귀살대 일행은 입신양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거창한 꿈을 꾸는 게 아니다. 그저 일상으로의 복귀, 그게 전부다.
귀살대는 다이쇼 시대 일본제국에 인정받지 않은 민간단체이며, 정부는 혈귀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한 분위기다. 폐도령을 어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인 일륜도도 숨기고 다니며, 혈귀만을 잡기 때문에 민간 피해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힐링팩터라도 있는지 손상된 신체가 즉각 회복되는 혈귀에 귀살대는 맨몸으로 맞서며, 그들에게 가족, 연인, 친구를 잃어 복수에 눈이 멀어있다. 혈귀와의 전쟁은 벌써 천년이 다 돼가서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른다. 목숨 내걸고 혈귀가 있는 전장만 쫓아다니기 때문에 그 수명도 매우 짧다. 그런 귀살대들의 행복한 단꿈이 그저 소소한 일상이 전부라는 게 참 처연하면서도,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거에 새삼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귀멸의 칼날의 원작 만화는 이미 완결이 났다.(무한열차편 다음이 궁금하다면 원작 정주행을 추천한다) 무한열차편은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 밖에 오지 않았으며, 원작을 읽은 사람들말로는 귀멸의 칼날의 진짜재미는 무한열차편 부터라고 한다. (TVA 1기 분량이 제일 재미 없는 부분이라고 한다.) 현재 귀멸의 칼날 2기 제작이 논의 중이며 빠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 초에는 공개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2기도, 그리고 그다음 나올 또다른 극장판도 이번만큼의 퀄리티를 유지한 애니메이션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재밌냐? | YES | NOT BAD | SO-SO | NOT GOOD | NO |
'재미'의 종류 | 액션 가득 일본 애니메이션 | ||||
추천 포인트 | 귀멸의 칼날 TVA 정주행 하신 분들에게 추천 | ||||
비추 포인트 | 반일 감정 있으신 분들에게 비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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